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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 "그대들, 무엇으로 흐름을 느끼는가." 만호 씨는 멀리 본다. 윗마을 높은 정자에서 간척지 논을 본다. 잠시 후 걸어갈 길을 먼저 눈으로 더듬는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다. 조생종 벼를 심은 논 필지는 수확이 끝났다. 떠돌이 백구는 눈으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어서 가자, 재촉한다.  만호 씨는 피한다. 막 수확이 끝난 논 옆 농로는 농기계 바퀴에서 떨어진 흙무더기가 마치 예의 없는 개들의 응가처럼 자리하고 있다. 밟아 좋을 것은 없다. 만호 씨는 피해 걷는다. 백구는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결코 밟지 않는다. 타고난 요령인지 터득한 지혜인지 모를 일이다.  만호 씨는 또 본다. 수확이 끝난 논에서 산비둘기들이 후다닥 날아오른다. 백구의 기척 때문일까, 아니면 만호 씨의 지팡이 소리 때문일까. 멀리 가지 않는다. 만호 씨와 백..
접대 - 비염 손님도 손님인지라. 만호 씨는 손님을 맞이한다. 올해는 조금 늦은 셈이다. 끈덕진 여름 더위가 손님의 걸음을 막아선 것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오고야 만다. 비염(鼻炎). 콧속 불꽃. 이제 막 도착한 참이라 손님도 예의를 갖춘다. 심하지 않다. 간헐적 재채기와 주르륵 콧물 정도. 절정이라고 할 코 막힘 증상은 없어 아직까지 코로 숨을 쉬고 있다.  만호 씨는 나름의 접대 방식이 있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니 접대 매뉴얼이 생길 만하다. 재채기가 터지려 할 때 재빨리 입으로 숨을 쉰다. 재채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연달아 터지는 것은 약간 줄일 수 있다. 또 침을 자주 뱉는다. 흐르는 콧물을 일일이 닦아내다간 콧구멍 속 피부가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콧물이 고인다 싶으면 최대한 입으로 빨아들인 다음 침과 함께 ..
죄책감 - 허기에 대비하고 있는가. 만호 씨는 구두쇠다. 또 건망증도 있다. 어제 외출 때 두 마리 개의 사료를 장만해야 했다. 하지만 망각했다. 사료를 살 수 있는 농협 자재 창고를 건너뛰었다. 핑계는 있다. 주문한 퇴비를 실은 차가 바로 출발한다고 했다. 퇴비를 부릴 장소의 정리가 필요해 서둘러 외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개밥 생각은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산책을 마치고 개들의 사료를 줄 때 저녁밥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오로지 개 사료를 위해 읍내까지 왕복 20킬로미터의 거리를 차를 몰고 외출하는 것은 낭비라 단정한다. 어차피 내일 낚시를 갈 것이다. 낚시 후 사료를 구입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  만호 씨는 미안하다. 오전의 예감은 현실이 된다. 오후 산책 후 사료 포대를 탈탈 털어 녀석..
가슴골 - 역시 오지에 살고 있다. 만호 씨는 이른 점심을 먹는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가을 농사다. 만호 씨는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훨씬 번화한 이웃 읍내로 향한다. 퇴비 판매처를 찾기 전에 만호 씨는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이곳 시장의 국밥집은 아침 일찍부터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만호 씨는 모듬국밥을 주문한다. 열려 있는 식당 문으로 들어서며 만호 씨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모듬국밥 하나요.’라고 말한다. 이른 시간인지라 손님은 딱 한 테이블에만 자리하고 있다. 만호 씨는 자리에 앉기 전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쪽으로 향한다. 세면대 옆 자리에 여성 두 명이 앉아 있다.   만호 씨는 놀라 작은 눈이 약간 커진다. 앉아 있는 여성의 옷차림 때문이다. 여성복 이름을 모르..
초인종 - 똥개 초인종은 가끔 오작동 한다. 만호 씨는 망설인다. 아직 조금 남았는데, 닦고 일어설까? 아니면 오보라 단정하고 내처 볼 일을 볼까? 망설인다. 그리고 이런 난감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은 두 마리 개를 원망한다. 더 나아가 두 마리 개를 이토록 짖도록 한 원인에 명백한 적의를 느끼는 만호 씨다.  만호 씨는 앉는다. 익숙한 오후 1시 50분께 하루 한 번 앉는 그 자리에 앉는다. 변기. 점심으로 먹은 음식이 느긋하게 아래로 흐르며 장을 자극한다. 휴대폰을 들고 앉아 몇몇 기사를 살핀다. 그때 요란하게 짖는 소리가 들린다. 시커먼 개와 떠돌이 백구가 동시에 짖는다.  만호 씨는 구분한다. 대문에 달린 초인종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다. 방문객이 외딴 집에 왔음을 알리는 역할은 두 마리 개가 수행하고 있다. 만호 씨는 두 마리 개..
방광 - 계절 변화에 민감한 신체 기관. 만호 씨는 달린다. 표시를 따라 달리고 달려 도착한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다. 절로 입에서 욕이 나온다. 만호 씨의 욕망은 자물쇠로 차단당한다.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차단당했지만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더욱 불타오른다. 만호 씨는 다시 달린다. 달리며 사드 백작을 떠올린다. 정당한 욕망은 타협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결론은 노상방뇨뿐인가.  만호 씨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세운다. 꿈속 질주의 원인은 현실과 이어진다. 채워진 방광이 잠과 꿈을 모두 몰아낸다. 어둠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한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오히려 눈은 기능을 잃는다. 본능적 조준으로 방광을 비운다. 아, 시원하다. 이건 타협이 아니다. 욕망은 해소된다. 새벽은 욕망이 불타오르는 동시에 해소되는 ..
덩치 - 왜가리는 짖는다. 만호 씨는 듣는다. 논가 수로에 자리한 왜가리가 떠돌이 백구의 접근에 휙 날아오르며 짖는다. 말 그대로다. 왜가리의 울음소리는 짖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극악한 소리다. 한때 고라니 울음소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언젠가 왜가리의 소리도 뜰 것이다.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만호 씨는 생각한다. 덩치가 큰 녀석들은 나름 권력을 지니고 있다. 자연에서 비만은 항상 권위로 이어진다. 그러니 굳이 소리를 다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면 덩치에 어울리는 것은 그런 괴팍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가리는 소리로 사랑받긴 힘든 조류다. 명금류로 불리는 새들이 있다. 소리가 고운 새들. 짐작컨대 그 새들은 모두 덩치가 작을 것이다.  독거중년 만호 씨는 남도 바닷가 마을 외딴 집에서 주위에 아무..
생존 - 잡초의 근접전이라는 기술. 만호 씨는 호미를 든다. 중간이 없다는 늦은 폭염과 가을 폭우에도 자라날 것들은 또 억세게 자란다. 쪽파 주변에 잡초들이 우거진다. 호미를 들고 쪼그려 앉는 만호 씨다.   만호 씨는 감탄한다. 잡초는 근접전을 택한다. 어떤 식으로든 쪽파 곁에 바짝 붙어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쪽파를 앉은뱅이로 만들려 한다. 삽으로 몇 번 뜨면 깨끗하게 정리될, 아니 호미로도 몇 번 파면 말끔하게 제거될 잡초이지만 그건 쪽파까지 희생시키는 작업이다.  만호 씨는 전투로 해석한다. 치열하게 지상전을 벌이고 있는 쪽파와 잡초. 만호 씨는 쪽파의 우군으로 공중 지원을 담당한다. 무자비한 공중 폭격은 언제든 가능하다. 만호 씨에겐 삽과 호미라는 막강한 화력이 있다. 이 화력을 쏟아낸다면 잡초라는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대추나무 - 태풍을 원망하지 않는다. 만호 씨는 밟는다. 장화를 신은 탓에 밟힌 그것의 윤곽이 발바닥에 그려진다. 대추다. 떨어진 대추. 걷는 중인지라 발바닥에 힘이 실린다. 익은 대추는 으깨진다. 만호 씨의 체중은 땅바닥 대추를 가볍게 으깰 정도로 무겁다.  만호 씨는 살핀다. 죽어가는 태풍의 밭은기침이라기엔 비도 바람도 거센 어제였다. 비설거지를 위해 장화를 신고 외딴 집 주변을 둘러보는 만호 씨다. 훌쩍 자란 들깨는 모두 쓰러졌고 올봄 넉넉하게 심은 대파의 허리도 45도 각도로 꺾여 있다.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대추나무다. 이번 비바람이 아니었다면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을 것인데 거의 대부분의 대추가 떨어져 풀밭과 시멘트 바닥 위에 뒹굴고 있다.   만호 씨는 포기한다. 바구니를 들고 와 바닥에 떨어진 대추 중 괜찮은 것들..
자기복제 - 귀신에게도 슬픈 외국어. 만호 씨는 두렵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귀신이라면 두려울 일이 없다. 귀신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설령 증오나 저주를 담고 있더라도 모르면 그저 아우성으로 들릴 뿐이니까. 그런 소리가 들린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아니면 태국이나 미얀마의 언어일 수 있다. 아무튼 외국어로 짐작되는 소리를 내뱉는 귀신이 만호 씨와 나란히 소파에 앉는다.  만호 씨는 이해한다. 절실한 탓에 귀신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했을 일이다. 또 그 귀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겁박인지, 부탁인지 알 수 없는 외국어라면 두려움보다 궁금함이 앞설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탓에 호통 칠 배짱도 생긴다.  만호 씨는 외친다. “아니, 한국에 나타난 귀신이라면 한국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귀신은 주춤한다. 한국에서라면,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