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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단상 33 - 담배의 반은 바람이 즐겼다. 만호 씨는 뒤집어쓴다. 점퍼에 달린 모자를 이미 쓰고 있는 야구모자 위로 덧씌운다. 귀가 따뜻해진다. 달려 있는 것들은 언제고 제 역할을 찾는 법이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의 격변에 만호 씨는 적이 놀란다. 어제 아침엔 똑같은 옷을 입고 산책한 후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오늘은 추위를 느낀다. 기온도 부쩍 내려간 듯싶지만 그보다 매서운 건 바람이다.  만호 씨는 주저한다. 이런 바람이라면 힘들 일이다. 그럼에도 달려간다. 짧은 아침 산책 후 저수지로 향한다. 평지 저수지인 탓에 바람을 피할 곳은 없다. 역시 저수지에는 파도가 친다. 유일한 호재는 최근 내린 비와 바람으로 심했던 녹조가 사라진 것뿐. 나머지 조건은 최악에 가깝다. 오늘은 낚는 기쁨은 아무래도 누리기 힘들 듯싶다.   만호 씨는 오발탄을 ..
친구 - 말의 허기를 이해했으리라. 만호 씨는 전화를 받는다. 땅끝 마을로 여행 중인 대학 친구 일행으로부터다. 만호 씨의 집 근처를 지날 터이니 함께 점심이라도 하자고 한다. 만호 씨는 그러자, 하고 약속 장소를 정한다. 만호 씨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식당에 도착한다. 반대로 친구는 15분 정도 늦을 것이라는 연락이 온다. 만호 씨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기다린다. 한때 자신이 지닌 것 중 가장 비싼 것이 시간이라고 말했던 만호 씨이지만 이제 그의 시간은 무척 싸다. 모처럼 만나는 친구를 위한 30분의 기다림은 공짜나 다름없다.   만호 씨는 대충 밥그릇을 비운다. 이야기를 듣고 또 가끔 제 이야기를 하느라 밥은 안중에 없다. 몇 가지 반찬으로만 위장의 허기를 지운다. 내내 공복이었던 탓에 말, 대화에 대한 허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장갑 - 생선 맛이 나는 단감을 먹다. 만호 씨는 장갑을 낀다. 장갑은 여러 켤레다. 각기 사용처가 다르다. 예초기를 돌릴 때나 흙을 만져야할 일을 할 때는 두 겹으로 겹친 장갑을 사용하고 산책을 할 때는 한 겹이지만 두툼한 목장갑을 낀다. 낚시할 때 착용하는 장갑도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악동 배스에게도 이빨이라는 것이 있어 맨손으로 주둥이를 잡을 때 곧잘 엄지의 피부가 벗겨지곤 한다. 그래서 예민한 반응을 놓칠 우려가 있지만 만호 씨는 얇은 장갑을 낀다.  만호 씨는 현관 포치에 앉는다. 제법 굵은 가을비가 내린다. 할 일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포치에 앉아 며칠 전 수확한 단감을 깎아 먹는다. 비에 젖지 않은 장갑이 낚시할 때 착용하는 장갑뿐인지라 그것을 끼고 큼지막한 식칼을 든다. 먼저 십자 모양으로 네 조각을 만들어 하나..
지청구 - "도대체 아는 것이 뭐냐?" 만호 씨는 묻는다. 오후 산책길에 만난 노파가 들깨를 베고 있다. “내일 비가 온다는데 베요?” 노파는 새들이 하도 파먹어서 벤다고 답한다. 이어 “들깨는 비 맞아도 괜찮아.” 라고 덧붙인다. 만호 씨는 최근에 알게 된 것이다. 들깨는 벤 자리에 그대로 뉘여 놓는다. 비가 오더라도 상관없다. 다시 볕을 맞아 바싹 마르면 털어 씨를 얻을 수 있다. 들깨는 자식을 오래 품는다.  만호 씨는 거인이다. 간척지 논의 벼 수확이 막바지다 도처에 공룡알들이 놓여 있다. 낟알을 훑은 볏대를 가축 사료로 발효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내내 궁금했지만 하지 않은 일이 있다. 마침 오늘 만호 씨는 책 속에서 그런 대목을 만났다. ‘행동하는 거인이냐 말만하는 난쟁이냐.’ 행동하는, 그래서 거인이 되려 하는 만호 씨다. 먼저 주..
까치밥 - 수확은 마약인지라. 만호 씨는 수확한다.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 선 만호 씨다. 지난해에는 단 하나의 감도 건지지 못했다. 으레 찾아오는 해거리인지 아니면 과도한 가지치기 때문인지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마을 노인들에게 들은 조언은 이렇게 귀착됐다. ‘약 안 하면 건질 게 없어.’ 하지만 올해도 만호 씨는 농약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농약을 칠 생각은 없다. 열리면 따 먹고 아니면 그냥 포기한다. 아무튼 올해가 풍성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단감과 대봉 수 십 개가 만호 씨의 눈에 제법 그럴싸하게 매달려 있다.  만호 씨는 고지가위까지 동원한다. 사다리 대신 높은 가지 위의 열매도 딸 수 있는 긴 팔을 지닌 전지가위를 이용한다. 몇 해 전 코로나 지원금이 나왔을 때 장만한 장비다. 감을 수확할 때 꽤 유용하다. 이리저..
칭찬 - "나 만나 용 된 거야." 만호 씨는 뿌듯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은가. 칭찬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지만 자신의 의지로 동행하는 생명에 대한 칭찬은 곧 자신에 대한 칭찬이라고 만호 씨는 받아들인다. 비슷할 수 있으려나.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칭찬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아무튼 만호 씨는 뿌듯하다.  만호 씨는 노부부와 만난다. 오후 산책 때 떠돌이 백구를 데리고 바닷가로 향한다. 멀리 노부부가 앞서 걷고 있다. 백구와 만호 씨의 걸음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걷는 노부부를 바로 따라잡는다. 만호 씨의 꾸벅 인사에 노부부는 길을 양보한다. 노인은 백구를 바라보며 한 마디 던진다. “아따 겁나 잘 돼 부렀네.” 백구의 떠돌이 시절을 알고 있는 노인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어 노파도 거든다. “터럭이 반질반질 윤이 ..
가을비 - 누군가 하늘의 뺨을 때렸다. 만호 씨는 창밖을 본다. 수시로 거실 창밖을 내다보는 만호 씨다. 언제고 비가 내릴 수 있는 하늘이다. 가을 텃밭 농사를 생각하면 한바탕 쏟아지는 비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비 창살 속에 갇히는 일은 반갑지 않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만호 씨다.  만호 씨는 장화를 신는다. 점심을 먹고 게으른 독서에 짧은 낮잠으로 오후를 시작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그럼 움직여야 한다. 등산화 대신 장화를 찾아 신는다. 아무래도 비가 곧 내릴 것만 같다. 텃밭 한 구석을 정리할 때 두둑 비가 내린다. 드디어 시작인가, 하늘을 바라보는 만호 씨다. 하지만 이내 시치미다. 뚝 그친다.   만호 씨는 오후 산책을 서두른다. 일기예보에도 분명 비는 온다고 했다. 비가 내리기 전 두 마리 개..
도박 - 때로 등을 돌려 도망쳐야 한다. 만호 씨는 멀리 걷는다. 오늘은 놀고, 내일은 쉬는 백수 만호 씨이지만 그래도 일요일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다른 요일과 뭔가 다르다. 달라야 한다. 하지만 만호 씨가 선택할 수 있는 다름은 많지 않다. 오늘은 그저 멀리 걷는 것으로 일요일에 마침표를 찍는다.  만호 씨는 백구의 목줄을 놓아준다. 이쪽 바닷길은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만호 씨는 떠돌이 백구의 목줄을 놓아주며 자유로운 질주를 즐기라 한다. 이런 제안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백구다. 달린다. 만호 씨에겐 걱정도 있다. 이젠 도깨비 풀들의 계절이다. 어디 풀숲에라도 들어가면 아마도 백구의 온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달라붙을 일이다. 오롯이 만호 씨의 맨손만이 그걸 떼어낼 수 있다. 번거로운 일이다.  만호 씨는 사람을 보고 놀란다. 백구..
금목서 - "혹, 여인네가 찾아오지 않았더냐?" 만호 씨는 대문 밖에서 느낀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느낀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향기. 강렬하다. 그 강렬함은 비염의 불꽃마저 뚫는다. 꽃향기다. 이맘때 두 그루의 나무가 뿜어내는 진한 존재감이다. 금목서라는 나무다. 아주 작은 꽃을 피우지만 향기는 거대하다. 만호 씨는 대문 밖에서 느끼고 취한다.  만호 씨는 여인을 찾았다. 남도 바닷가 마을 외딴 집에 처음 정착했을 때 이 향기의 주인이 나무라 생각지 못했다. 진한 화장을 한 여인네가 외딴 집을 찾은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두리번거린 만호 씨였다. 어느 구석에서 불쑥 자신을 남몰래 흠모한 여인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상상은 향기로 망상이 된다.   만호 씨는 오늘도 두리번거린다. 이젠 그것이 나무의 유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와 이웃한 집을..
나무 - "물구나무서지는 말아라." 만호 씨는 답을 듣는다. 드물게 오지 생활에 대한 안부를 물어오는 도시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만호 씨가 곧잘 하는 대답은 이랬다. “나무처럼 살고 있습니다.” 바로 답이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나무처럼’이란 말에 잘 살고 있나 보다 안심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이들도 있었다. 독서가인 한 선배는 이렇게 문자로 답했다. “그렇다고 물구나무서지는 말아라.‘  만호 씨는 한참 나중에 그 의미를 이해한다. ‘나무처럼’이란 말에 왜 ‘물구나무’가 나오지 했는데 시간이 흘러 소설을 읽은 다음에야 만호 씨는 선배의 독서 이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와 만호 씨가 읽은 소설은 바로 그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만호 씨는 불편한 독서로 기억한다.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만호 씨는 생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