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209) 썸네일형 리스트형 명절 -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만호 씨는 고요 속을 걷는다. 길지 않은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잔뜩 흐린 날씨 속을 걷는다. 예년에 비해 복작거리지 않은 명절이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명절 땐 도시 개 몇 마리와 마주치곤 했는데 올해는 도시 사람마저 드물다. 그만큼 고요는 빨리 그리고 무겁게 시골 마을을 감싼다. 세 명의 노인과 마주친다. 만날 때마다 명절 잘 쇠셨나, 인사를 건넨다. 노인 둘은 자식들이 일찍 떠났다고 답하고 한 노인은 아예 오지 않았다고 답한다. 짧은 만남을 가진 노인도, 또 아예 자식, 손자와 만나지 못한 노인도 쓸쓸한 얼굴이다. 만호 씨는 그저 씩 웃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독거중년 만호 씨는 남도 바닷가 마을 외딴 집에서 명절은 오히려 쓸쓸함을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아쉬.. 귓밥 - 역시 대물은 드문 법이다. 만호 씨는 귀를 후빈다. 갈망하던 비가 딱 원하는 양만큼 온다. 비가 오지 않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해결한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서둘러 오후 산책을 마치고 반신욕조에 물을 받는다. 몸을 진득하게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보다 더 목욕을 원하는 것은 화장실 세면대고 거울이고 변기다. 30분 정도 하반신과 상반신을 번갈아 물에 담근 후 그 물로 화장실 청소를 한다. 몸을 씻은 것보다 더 개운하게 다가오는 말끔한 얼굴의 화장실이다. 저녁을 먹고 독서를 하는 도중 왼쪽 귀에 찾아온 낯선 느낌에 깜짝 놀란다. 소리 없는 지진과 같다. 처음엔 날벌레가 귓구멍 속으로 돌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함부로 손가락을 놀리면 벌레가 귓속 깊이 파고들 것이라 우려해 조심스럽.. 한가위 - 낮엔 황후로, 저녁엔 거지로. 만호 씨는 황후이자 거지다. 명절 당일. 도시로 나가 점심을 걸게 먹는다. 황후의 만찬이 부럽지 않다. 명절의 풍요로움을 위장으로 느낀다. 그리고 돌아온다. 점심 때 먹은 양을 생각하면 저녁은 건너뛰어도 될 듯싶지만 만호 씨의 소화 능력은 여전히 청춘이다. 소화를 위해 제법 길게 오후 산책을 한 탓인지 포만감은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희미해진다. 그리고 허기가 찾아온다. 꽉 찬 후 찾아온 공백은 서럽다. 하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다. 라면이라도 끓일까, 하지만 그건 또 처량하다. 명절 당일에 라면이라니. 물론 귀찮음이 큰 이유이긴 하다. 허나 일단 느끼기 시작한 허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주로 아침에 먹는 시리얼을 우유 한 사발과 함께 마시듯 먹는다. 그래 지금, 대충 허기는 지워진다. .. 이전 1 2 3 4 ··· 40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