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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밥 - 역시 대물은 드문 법이다. 만호 씨는 귀를 후빈다. 갈망하던 비가 딱 원하는 양만큼 온다. 비가 오지 않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해결한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서둘러 오후 산책을 마치고 반신욕조에 물을 받는다. 몸을 진득하게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보다 더 목욕을 원하는 것은 화장실 세면대고 거울이고 변기다. 30분 정도 하반신과 상반신을 번갈아 물에 담근 후 그 물로 화장실 청소를 한다. 몸을 씻은 것보다 더 개운하게 다가오는 말끔한 얼굴의 화장실이다. 저녁을 먹고 독서를 하는 도중 왼쪽 귀에 찾아온 낯선 느낌에 깜짝 놀란다. 소리 없는 지진과 같다. 처음엔 날벌레가 귓구멍 속으로 돌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함부로 손가락을 놀리면 벌레가 귓속 깊이 파고들 것이라 우려해 조심스럽..
한가위 - 낮엔 황후로, 저녁엔 거지로. 만호 씨는 황후이자 거지다. 명절 당일. 도시로 나가 점심을 걸게 먹는다. 황후의 만찬이 부럽지 않다. 명절의 풍요로움을 위장으로 느낀다. 그리고 돌아온다. 점심 때 먹은 양을 생각하면 저녁은 건너뛰어도 될 듯싶지만 만호 씨의 소화 능력은 여전히 청춘이다. 소화를 위해 제법 길게 오후 산책을 한 탓인지 포만감은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희미해진다. 그리고 허기가 찾아온다. 꽉 찬 후 찾아온 공백은 서럽다. 하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다. 라면이라도 끓일까, 하지만 그건 또 처량하다. 명절 당일에 라면이라니. 물론 귀찮음이 큰 이유이긴 하다. 허나 일단 느끼기 시작한 허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주로 아침에 먹는 시리얼을 우유 한 사발과 함께 마시듯 먹는다. 그래 지금, 대충 허기는 지워진다. ..
불꽃 - 바닷가에서도, 콧속에서도. 만호 씨는 대면한다. 요 며칠 살기를 감추고 있던 비염이 오늘은 날을 세운다. 鼻炎. 콧구멍 속의 불꽃들. 답답하거나 추접하거나 숨이 넘어간다. 콧구멍 두 개가 모두 막히면 엄청 답답하다. 그러다가 어느 하나라도 뚫리면 통제가 불가능한 콧물이 주르르 흘러 추접해진다. 막히고 뚫리는 와중에 재채기가 연이어 터지면 정말 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천장을 보며 똑바로 눕는 것이 가장 편한 자세다. 중력의 도움으로 답답함도 풀리고 콧물도 범람하지 않는다. 호흡이 고르면 재채기도 투정을 멈춘다. 하지만 태양이 움직이라 외치는 대낮에 마냥 누워만 있어야 할 것이냔 말이다. 그래서 밤이 고마운 만호 씨다. 이젠 편히 누워도 된다. 만호 씨만 자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속의 불꽃들도 잠을 잔다. 물론 새벽 찬 기운에 벌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