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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염 - 더디 오시고 일찍 가시길. 만호 씨는 지레 놀란다. 대추를 수확하기 위해 사다리 위에 올라간다. 계속된 건조한 날씨에 아직 푸른 대추나무 잎사귀들에 제법 많은 먼지들이 쌓여 있다. 대추를 하나하나 딸 때마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들이 있다. 터진다. 재채기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거푸 이어진다. 먼지 때문일까? 아니면 올 때가 된 탓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비염인가? 일단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삼단 사다리 꼭대기에서의 재채기는 위험하다. 재채기는 온몸을 흔든다. 자칫 떨어질 수 있다. 재채기 중간 잠시 세상을 세운 만호 씨다. 대추나무 아래에서 정지 화면이 된다. 다행히 재채기는 잦아든다. 대신 약간의 콧물이 고인다. 풀지 않고 뱉는다. 콧물이라면 비염일 확률이 높아진다.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인가. 이어진 오후 산..
낚시 단상 59 - 편애의 시작. 만호 씨는 편애한다. 편애는 딱 한 마리에서 시작된다. 크기는 상관없다. 이 루어에 반응이 있었고 낚아 올렸다는 사실에서 사랑 차별은 시작된다. 영 반응이 뜸할 때, 낚아 올린 그 한 마리의 기억이 찾아온다. 이 녀석으로 낚았지, 하며 채비를 교체한다. 악동 배스들이 편식이 심해 한 루어에만 반응하는 경우가 없진 않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다. 평균적으로 낚아 올리는 확률은 얼마나 그 루어를 자주 사용하는가, 이것으로 결정된다. 많이 쓰면 많이 낚고 드물게 쓰면 드물게 낚는다. 오늘도 만호 씨는 편애한다. 채비는 프리리그, 루어는 워터멜론 색깔의 5인치 스트레이트 웜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연초록색 굴곡 없는 직선형 지렁이 형태의 고무 재질 미끼다. 남도 바닷가 마을 인근 저수지의 악동들이 이..
타임머신 - 과거로의 여행은 가능하다. 만호 씨는 돌아간다. 마땅히 남길 하루의 기록이 없어 과거를 더듬어본다. 근 30년의 일기라면 제법 묵직하다. 10년 전 오늘을, 20년 전 오늘을 살핀다. 어설픈 치기가 보이지만 그래도 꽤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 곁에 있다면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한 대목이 이렇다. ‘비록 하찮을지언정 내가 중심인 우주는 존재한다.’ 여전히 그 우주에 살고 있는 만호 씨다. 독거중년 만호 씨는 남도 바닷가 마을 외딴 집에서 과거로 돌아간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타임머신은 존재한다. 다만 과거로만 갈 수 있고 미래로는 갈 수 없다. 기록이 존재하는 한 과거 여행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