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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 "그대들, 무엇으로 흐름을 느끼는가."

만호 씨는 멀리 본다.

윗마을 높은 정자에서 간척지 논을 본다. 잠시 후 걸어갈 길을 먼저 눈으로 더듬는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다. 조생종 벼를 심은 논 필지는 수확이 끝났다. 떠돌이 백구는 눈으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어서 가자, 재촉한다.

 

만호 씨는 피한다.

막 수확이 끝난 논 옆 농로는 농기계 바퀴에서 떨어진 흙무더기가 마치 예의 없는 개들의 응가처럼 자리하고 있다. 밟아 좋을 것은 없다. 만호 씨는 피해 걷는다. 백구는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결코 밟지 않는다. 타고난 요령인지 터득한 지혜인지 모를 일이다.

 

만호 씨는 또 본다.

수확이 끝난 논에서 산비둘기들이 후다닥 날아오른다. 백구의 기척 때문일까, 아니면 만호 씨의 지팡이 소리 때문일까. 멀리 가지 않는다. 만호 씨와 백구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내려앉는다. 모처럼 찾아온 포식의 기회를 인간과 개 탓에 놓치지 않으려 함이다.

 

만호 씨는 뒤돌아본다.

가지런히 잘려 놓인 벼 줄기가 자꾸 시선을 당긴다. 멈춰 있는 죽은 벼지만 만호 씨는 흐름을 느낀다. 느긋하지만 어김없는 시간의 흐름.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탄식이 만호 씨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도시에서 살 때 무엇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꼈던가? 바삐 움직이느라 지나고 난 다음에야 갔구나, 하지 않았던가.

 

독거중년 만호 씨는 남도 바닷가 마을 외딴 집에서 문득 묻고 싶어진다. “그대들, 무엇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가?” 여인네 옷차림 정도만 떠오르는 만호 씨다.